시간의 층위를 더듬는 먹빛 여정

이철량의 허백련상 수상기념전《시정유묵(市情幽墨), 지금-여기》

전시탐방 ● 2025

Author

  • 강경석
  • 전남대학교 박사과정 / 미술이론

이철량의 허백련상 수상기념전《시정유묵(市情幽墨), 지금-여기》

시간의 층위를 더듬는 먹빛 여정-이철량의 《시정유묵(市情幽墨), 지금-여기》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철량의 개인전 《시정유묵(市情幽墨), 지금-여기》는 1980년대 한국 수묵화 운동을 이끌었던 작가의 50여 년에 걸친 작업 궤적을 조망한다. 2024년 허백련미술상 본상 수상을 기념하여 기획된 이번 전시는 약 50점의 작품을 통해, 작가가 ‘먹’이라는 전통 매체를 어떻게 동시대 회화의 언어로 전환해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림  《시정유묵(市情幽墨), 지금-여기》전시장 전경
작가는 오랜 시간 동안 먹에 부여된 정신성이라는 전통적 명제에서 벗어나, 먹 자체의 물성과 그것이 종이 위에서 만들어내는 시각적 효과에 주목해왔다. 이번 전시의 1부 ‘전통과 현대 사이 – 새로운 수묵’에서는 이러한 실험의 출발점을 확인할 수 있다. 1970-80년대 초기작 〈무제(Untitled)〉(1978)와 〈언덕(Hill)〉(1980, 1982) 연작은 수묵화의 전통적 문법을 따르면서도, 먹의 점·선·면, 번짐의 효과를 통해 현대 회화로서의 수묵화 가능성을 탐색했다. 이미 이 시기부터 작가는 먹이 지닌 정신적 의미보다 재료 그 자체의 물질성에 주목한 것이다. 붓끝에서 번져나가는 먹의 우연성과 그것을 통제하고 구조화하는 작가의 의도 사이에서 화면은 긴장감을 획득한다. 이는 단순히 전통 수묵화를 현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수묵화라는 매체가 동시대 미술의 맥락에서 어떤 조형적 가능성을 지니는가를 묻는 작업이었다.


이철량의 관심은 점차 먹의 물성을 넘어 시간성으로 확장되어 간다. 2부 ‘동시대 회화로서의 수묵 – 또 다른 자연’에서 펼쳐지는 2000년대 이후의 작업들은 이러한 변화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특히 〈도시〉(2007-2018) 연작에서 작가가 시도하는 것은 ‘자연 중심의 수묵’에서 ‘도시 중심의 수묵’으로의 전환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시의 윤곽이 아니라, 도시가 품고 있는 시간의 축적과 변화의 과정이다. 흑과 백의 대비는 단순한 명암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시간의 층위를 드러낸다. 전통 산수화가 자연을 하나의 생태계로 바라본 것처럼, 이철량은 도시를 유기적 생명체로 재해석하며, 그 안에 축적된 시간들을 가시화한다.


〈또 다른 자연〉연작은 이러한 관점을 더욱 밀고 나간 작업이다. 이제 자연은 산과 숲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시 속 흔적, 인간의 존재, 시간의 흐름이 얽힌 모든 것이 작가에게는 자연이다. 화면 속 작은 점들이 모여 군집을 이루듯, 개별적 순간들이 축적되어 거대한 시간의 풍경을 구성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먹이라는 전통 매체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를 사유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동시대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강변한다.


그림  《또 다른 자연》연작
전시 제목인 ‘시정유묵(市情幽墨)’은 도시의 감정(市情)을 그윽한 먹(幽墨)으로 표현한다는 의미겠지만, 전통 수묵화가 자연의 정신을 담아냈다면 이제는 도시적 삶의 본질을 먹으로 사유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작가의 미학적 견해를 고려한다면 ‘시정유묵(市精幽墨)’ 또한 그 의미가 닿는다. 어쩌면 세속적이며 현실적인 도시(市)의 정수(精)와 전통적이고 정신적인 그윽한 먹(幽墨)의 결합은, 쉬 어울릴 수 없는 조합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철량에게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도시를 부정적인 공간으로 보지 않고 현대적 생명체로 받아들이는 작가의 관점에서, ‘市精’은 도시적 삶의 정수, 즉 인간의 흔적·시간·기억·관계 같은 현대적 자연을 의미한다. 그리고 ‘幽墨’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내면과 사유를 담는 정신적 매체로서의 먹이다. 먹의 농담, 번짐, 흔적이 시간과 존재를 담아내는 매체라는 인식이 이 조어 속에 압축되어 있다.


결국 ‘시정유묵’은 “현대의 자연, 즉 도시와 인간의 존재를 수묵으로 사유한다”는 작가의 일관된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1980년대 이후 한국화 담론의 중요한 변곡점을 표상하는 언어적 실천이기도 하다. 전통 수묵화가 산수 속에서 정신을 길어 올렸다면, 이철량은 도시 속에서 시간과 존재의 본질을 길어 올린다. ‘정(精)’과 ‘유(幽)’는 모두 눈에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을 가리킨다. 도시 속에서 사라지고 잊히는 ‘기억’, ‘시간’, ‘정신’을 먹으로 드러내려는 시도. 그것이 바로 이철량이 50여 년간 천착해온 작업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탐구는 결국 시간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작가는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대신, 대상이 지닌 시간까지를 포함하고자 한다. 그에게 먹을 다루는 일은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행위다. 50여 년의 작업 궤적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이 시간성이다. 초기의 매체 실험이 먹의 공간적 효과에 집중했다면, 최근 작업은 시간의 축적과 순환이라는 보이지 않는 차원을 시각화한다. 계절의 흐름 속에서 쌓여가는 시간과 생명의 순환을, 그는 흑과 백의 긴장과 조화를 통해 화면 위에 응축시킨다. 먹(墨)은 물질이지만, 그 번짐과 흔적은 비물질적 시간성을 드러낸다. ‘시정유묵’은 이러한 물질과 비 물질, 현실과 정신의 경계를 넘나드는 언어다.


이렇듯 작가는 전통과 현대, 도시와 자연, 과거와 현재라는 경계에서, 먹이라는 매체를 통해 ‘지금-여기’의 존재 방식을 질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미술이 시간을 다루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근원적 성찰로 이어진다. 그의 먹빛은 과거에서 출발해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시간의 강물처럼, 멈추지 않고 순환하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다.


이철량 (Lee Cheol-ryang)

홍익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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