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체주의
Candellai_destruction
어딜 가나 ai타령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들의 핵심에는 분명코 사람이 있다. 교육과 문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종족개념 으로서의 ai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는 호기심과 더불어 편의에 대한 기대와 함께 상당한 수준의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이 ai에 대한 우려를 시작한 것은 창작영역이었다. 20 세기의 기계에게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던 역량이 21세기의 기계에게 가능해졌다. 이제 기계는 수행의 기능을 넘어 재생산의 영역에 도달해 있다. 이 재생산의 과정에 기계의 독자적인 판단이 관여해 있다는 사실은 인간으로서는 두려운 일이다.
ai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은 기계의 감정표현 가능성을 예측하면서 발생하였다. 감정표현은 예술창작에 직결된다. 이미 ai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수십억대에 판매된 사례가 나온지 오래다. 쟁점은 인간이 이것을 예술작품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혹은 일종의 기록적 결과물로서 취급해야 하는가 문제다. 여기에는 예술작품에 대한 인식판정과 더불어 인간의 산물 로서의 예술에 대한 가치판단까지 관여해 있다.
미술영역에 있어서 이 문제는 많이 심각해졌다. 예술에서 ‘가치’의 영역은 곧바로 ‘존재’의 경계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 이다. 상기의 두 문제에 대하여 작가는 통섭적 사고를 유지할 수 밖에 없다. 미술은 음악과는 달리 예술작품으로서의 판정이 매우 주관적이고, 역사적 맥락에서 충분히 달라질 수 있으며 또한 다분히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들에 맞물려 나는 이번 전시를 고민하였다. 과연 우리가 인정해야 할 ai가 만든 이미지에 대한 예술적 가치 판단은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를 말이다. 상업성과 생산성에 매달린 작가들은 작가로서의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ai가 자신의 스타일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을 ai의 역할로 한정 짓는다. 작가의 ‘개인성’이란 작품에 작가만의 감정과 직관이 삼투되어 있어야 비로소 활성화 되는 것이다. ai는 내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며 명령자인 나조차 예측하지 못한 이미 지를 생산해 낼 것이다. 그것을 나의 예술로 읽는다는 근거는 오직 결과물에 대한 사유의 주체가 예술가인 나라는 것뿐인가? 그래서 우리는 그 결과물을 ‘예술작품’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다층적인 고민 끝에 나는 ai를 시험하고 노출시킨 후 그것을 나의 감각과 상호교환, 교류비교의 과정 후에 해체 하기로 결정하였다. 기계의 도움을 받는 것은 마치 미끼를 만드는 과정을 맡기는 것과 같다. 나는 ai가 만든 그럴듯한 형태 를 그대로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무능한 범인이 아니라 마치 천재적 사냥꾼처럼 그것을 처음부터 계획하고 명령한다. 나는 내 의지를 수행한 기계의 결과물을 날것의 포획물처럼 널어놓고, 잔인하게 가르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데이터에 없던 우연한 내장들을 끄집어 낼 것이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이미지의 시체위에 다시 날카로운 연장들을 들이댄다.
기계는 나의 의도를 반영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판단은 오직 예술가인 내가 한다. 나는 기계의 의도를 나의 직관과 감각 으로 해체하기 시작했다. 마치 애초에 그것이 나의 의도가 아니었던 것처럼, 혹은 기계의 수행을 부정하는 것 마냥 나는 ai가 만든 그럴듯한 이미지를 교묘하게 파괴한다. ai의 해석에 대한 지움, 왜곡을 통한 재생산이라는 과정은 어쩌면 기계에 대하여 인간 예술가로서의 나의 우월함을 선언하는 것처럼 비춰질지 모르겠다. 한편으론 그것이 마냥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조심 스레 고백해본다. artist note/ J jinyong
권기철展